
폭력의 시대
ㅡ페킨파, 채플린 그리고 68혁명을 중심으로
by 신종훈
2차대전이 끝나며 쟂더미가 된 유럽에선 패전국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영화의 경향이 등장했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neo-realismo. 1940년대)이 그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비토리오 데 시카 같은 일군의 감독들에 의해 시작된 이 영화 운동은 1952년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소멸되었지만, 그 영향은 지구상의 모든 영화들에 영향을 주게된다.
프랑스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 1950년대), 영국 프리 시네마(british new wave. 1950~60년대)의 많은 감독들은 그들이 네오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공공연히 말하였다. 그리고 스페인의 스페인 누에보 시네(nuevo cine espanol. 1960~70년대), 서독의 뉴 저먼 시네마(new german cinema. 1960~70년대) 같은 영화 운동들 역시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러한 영향은 인도, 일본, 미국 등에서도 압도적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잠시 1950년대의 일본으로 가보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나생문』(羅生門. 1915)을 원작으로한, 영화 <라쇼몽 羅生門>(1950)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구로자와 아키라는 4년 뒤에 또 다시 전세계가 놀랄만한 영화를 발표한다.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1954)가 바로 그것이다.
七人の侍
구로자와의 이 영화는 일본식 웨스턴의 진수다.
1903년 부터 시작된 장르인 웨스턴은 미국식 개척자 정신의 신화를 서부에서 구체화 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1920년대 리얼리즘을 웨스턴에 접목하고 토키 시대 이후로도 웨스턴은 여전히 인기있는 장르였지만, B급 영화로 떨어진다. 그러던 웨스턴이 1950년대 필름느와르와 만나면서 이데올로기에의 복무만이 아닌 주인공의 정신분석과 폭력에의 열망을 표출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950년대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쇠퇴, 시네마스코프의 도입,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그리고 메카시즘에 의한 당시의 정치적 불안의 반영일 것이다.
그 시기에 구로자와 아키라가 <7인의 사무라이>를 발표한 것이다.
<7인의 사무라이>는 웨스턴에서의 동부-서부, 백인-인디언, 문명-자연 식의 2분법에 기초한 저속한 이데올로기를 제거한 대신 당시의 새로운 경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 High Noon>(1952)이 웨스턴을 부활시켰다면, 구로자와는 웨스턴을 일본식으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마카로니 웨스턴처럼 일본에서는 웨스턴이 자리잡지 못했다. 오히려 웨스턴의 기본 틀이 극동아시아에선 시대극으로 변모하게 된다.

High Noon
그런 <7인의 사무라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신은 초반의 결투신이다. 황량한 대로변에서 두 총잡이가 총을 뽑는게 아닌, 두 칼잡이가 칼을 뽑는다. 오랜 침묵끝에 그들의 농축된 근육이 움직이고, 한 무사가 피를 뿜으며 죽는다.
구로자와는 사람의 무의식에 내재된 폭력성을 단 하나의 신으로 거의 완벽하고 대단히 효율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구로자와의 주된 관심사는 폭력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폭력성을 극한까지 끌어간 사람은 샘 페킨파였다.

샘 페킨파
그에겐 폭력 미학의 거장, 폭력의 피카소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의 출세작인 <와일드 번치 The Wild Bunch>(1969)는 당시 웨스턴의 수정주의 경향을 완전히 바꾸게 한다. 베트남 전쟁의 우화로도 읽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기관총과 죽어가는 총잡이들을 슬로우모션으로 잡아 피와 죽음이 터져나오는 화면에 시적 서정성을 부여한다.
The Wild Bunch
구로자와가 몇 개의 신으로 짧고 굵게 표현한 것을 페킨파는 3천 6백여개의 컷으로 영화 전체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루함이 아닌 극한의 간접체험이라는 점에서 또한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

소녀의 절규
현 콩 닉 웃의 사진 <소녀의 절규>(1972)가 보여주듯, 1960~70년대의 베트남은 개인의 무의식에 잠재한 폭력이 아닌, 국가와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로 중무장한 폭력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흔히 위의 사진을 보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를 자문하곤 하는데, 오히려 무엇을 위한 폭력인가, 로 질문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전쟁이야 승리자를 위한 것이지만, 폭력에는 진정한 승리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페킨파의 후기작인 <철십자 훈장 Cross of Iron>(1977)이다.
Cross of Iron
이 영화에서 그는 좀더 노골적으로 폭력의 사회화와 사회적 폭력의 개인화를 그리고 있다.
페킨파가 <철십자 훈장>을 세상에 선보이던 1977년 한 사람이 죽었다. 그는 코미디언이었고 영화감독이었다. 또한 그는 로리타콤플렉스가 있었던게 분명했다. 그는 결혼을 4번 했는데 모두 십대 소녀와의 결혼이었다. 그리고 그는 매카시즘에 반대해 박해 받는 것을 선택했다.

찰리 채플린
1977년에 88세로 죽은 채플린은 죽기 10년 전까지 영화감독, 배우, 각본가, 영화음악을 할 정도로 정열적으로 살았다. 실상 그의 영화는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기에 폭력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웃음을 빼고나면 남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비정한 사회의 폭력성이다.
<시티 라이트 City Light>(1931)는 아메리카 드림의 그늘진 모습을,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1936)에선 1929년에 시작되어 10년간이나 이 행성의 바닥을 치게한 대공황 상태의 미국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는 <모던 타임즈>에서 자본주의의 추악한 일면을 풍자하는데 거침이 없다.

Modern Times
오히려 자본주의와 미국사회에 대한 풍자가 아닌 조롱에 가까울 정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이나,『자본론』(Das Kapital. 1권 1867, 2권 1885, 3권 1894)을 고심하며 읽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의 네 가지 소외 가운데 '생산활동으로서의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한 영화가 또 있을까?
채플린의 폭력에의 고찰은 이후의 영화인 <독재자 The Great Dictator>(1940)에서 좀더 심도깊어진다.

The Great Dictator
이 영화에서 그는 히틀러에 대한 풍자를 넘어서서 인간의 은밀한 폭력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는 폭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이든 생존에의 욕구가 있기 마련이고, 자아의 생존은 타자와의 투쟁을 통해 보장받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한 생존욕구가 현대엔 교양과 교육으로 좀더 세련되었지만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존에의 폭력성은 예수나 붓다도 없애지 못했다.
예수나 붓다를 팔아 밥먹고 사는 종교사업가들이 많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전쟁과 학살을 자행한 것은 종교였다. 사랑이나 자비는 자신의 울타리안에 있는 신도들에게만 유효한 것이었고, 이교도에겐 철저하게 냉혹한 것이 종교였다.
그런 종교만큼이나 맹목적인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데올로기다.
채플린이 그의 마지막 영화인 <홍콩의 백작부인 A Countess from Hongkong>(1967)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68년 3월 22일 빠리 대학 낭떼르 분교에서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20세기 마지막 혁명의 시작이었다.
4월 25일 투르 대학에선 좌파와 우파의 단체가 충돌하여 유혈사태로 번졌고, 이를 빌미로 대학 자체적으로 학교를 폐쇄하고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학생운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5월 초 빠리 대학 낭떼르 분교와 소르본느 대학이 폐쇄되고 그 과정에서 대학생 527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소규모 학생운동으로 불거져 나온 정치에 대한 불만은, 5월 10일의 바리케이트의 밤을 고비로 프랑스노동총동맹(CGT), 프랑스민주노조연맹(CFDT), 프랑스교원노조(FEN)의 동조파업과 13일 수십만명의 대학생·고등학생·노동자 들이 빠리와 지방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15일에서 17일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의 공장점거가 확산되고 교통이 두절되기 시작하였다. 20일부터는 석유 공급이 어려워지고 일용품의 공급에 차질이 오기 시작하였으며 22일 방송인협회(ORTF)도 시위에 참여하여 방송에 대한 검열을 비판하였다.
소규모 학생운동이 프랑스 전역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누벨 바그의 프랑스 영화계도 68혁명의 거친 파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히려 학생운동과는 별개로 시작되었지만, 랑그루아 사건으로 인해 68혁명이 더 확대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랑그루아 사건이란 시네마떼끄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그루아가 1968년 2월 9일 해임되자, 누벨 바그 감독들과 영화광들이 이에 반대하고 시위를 하게 됨으로 시작된다.
당시 찰리 채플린, 구로자와 아키라, 잉마르 베리만, 니콜라스 레이,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프리츠 랑, 알프레드 히치콕 등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차는 거장들이 랑글루아의 복직을 요구할 정도로 랑그루아 사건은 세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고, 그 와중에 3월에 낭떼르 분교에서 폭파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The Dreamers>(2003)에 아주 잘 회고되어있다.
베르톨루치는 단순한 회고나 다큐적 재현이 아닌, 1968년 빠리에 살았던 영화광인 세 청년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서로의 몸에 대한 탐닉을 통해 폭력적인 시대와 폭력적일만큼 격렬한 그들 세 명의 사랑에 대해 꿈꾸듯 보여주고 있다. 매튜와 이자벨이 데이트를 하던 밤 거리의 바리케이트를 기억하라! 그리고 이자벨과 테오가 화염병을 던지던 라스트 신도 기억하라!
The Dreamers
베르톨루치보다 약간 더 정치적이지만 좀더 68혁명의 본질에 접근한 영화가 있다. 게다가 그 두 영화는 상당히 닮았다. 남자 둘에 여자 한명, 그 셋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삼각관계라는 점에서.
The Dreamers
Die Fetten Jahre sind vorbei
그 닮은 꼴의 영화는 <몽상가들>이 발표된 다음 해에 발표되었다. 독일 영화에 노골적으로 냉담한 프랑스의 깐느영화제 본선에 진출하고, 독일 자국에선 그해 최고의 영화로 선정된 영화인 한스 바인가르트너의 <에쥬케이터 Die Fetten Jahre sind vorbei>(2004)가 바로 그 영화다.
비단 세 명의 청춘이 서로 삼각관계인 것만이 닮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 청춘의 분노와 자유에의 욕구가 더 닮았다. <몽상가들>에서 쌍둥이 남매와 한 남자가 서로 알몸으로 같이 자는 것이나, <에쥬케이터>에서 세 청년이 테러와 납치를 하는 것은 이유없는 반항이 아닌, 정당한 반항이다. 비록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자유에의 의지는 그런 실패마저도 극복하게 한다.
랑그루아 사건과 각 대학의 좌파 학생운동 그리고 노동자의 시위로 그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프랑스의 68혁명도 그랬다.
5월 11일 퐁피두 수상이 수상방송을 통해 소르본느의 재개, 재판의 재심, 체포학생의 석방을 약속하였고, 13일 밤 카르체 라탄의 경찰대를 철수시켰다. 이러한 정부의 유화정책에 대해 좌파는 정부와의 협상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5월 22일부터 노조 지도부는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학생들과의 연대를 완전히 단절한다.
결국 CGT는 정부, 사용자, 노조 3자 협상을 통해 5월 27일 그르넬 협약 체결을 통보한다. 협약내용은 시간당 최저임금이 35% 인상되어 3프랑, 임금의 10%인상, 의료보험료 인하, 소득세 감면, 노조의 기업내 활동보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르넬 협약은 노동자들로부터 거부당하고 파업은 지속된다.
이러한 예상 외의 움직임에 드골 진영은 기민하게 대응한다. 5월 30일 50만 명이 드골 지지 데모를 벌였고 드골은 국회를 해산한 후 선거체제로 국면을 전환시킨다. 금외화준비의 급속한 유출로 인한 프랑절하의 가능성과 경제위기를 강조하고,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내란의 위기를 암시하여 드골체제에 의한 현질서의 유지인가 경제적 파탄과 내란의 위기인가에 대한 양자택일을 프랑스 국민에게 강요한 것이다.
결국 6월 13일과 20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드골 파는 국회의석이 200석에서 293석으로 증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하여 68혁명은 막을 내렸다.



여기서 우리는 권력의 폭력성을 명백하게 목격하게 된다. 경찰과 군대로 무장한 권력은 언론과 이미지마저 장악함으로써 합법적으로 폭력성에 대한 근거를 구축하고, 국가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통해 도덕적 책임마저 짊어지고 있는 척을 한다.
지난 세기 프랑스의에만 유효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도 비슷하다. 아무튼 68혁명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지난 세기 마지막 꿈이었던 68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프랑스에서는 1981년까지 우파 정권이 계속 집권을 했고(하긴 대한민국에는 변변한 좌파 정당도 없지만), 혁명은 그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체 몇몇 인상적인 구호만을 남겼을 따름이다.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68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68을 기약할 수 있다.
폭력적인 세계가 약간 지루하겠지만 나는 2068년까지 살 것이다.
상상력에 권력을!
원문 => http://blog.naver.com/gebarache/120045439439










